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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리뷰

영화 버닝 해석 - 모든것들의 경계

by 2021. 12. 2.

영화 버닝 해석 / 모든 것들의 경계

영화 버닝은 연관 키워드에 '해석'이 있을 정도로 영화 자체를 '어렵다' 여기는 평들이 많습니다. 버닝은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지인의 집에서 벽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스크린으로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첫마디는 '와- 미쳤다'였습니다. 무수한 은유와 상징을 영화 곳곳에 녹아들게 한 이창동 감독에게 절로 박수가 쳐지더군요. 그리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의 필력이란. 

 

영화 버닝 주인공 세사람
영화 버닝 / 세사람의 관계를 한 번에 보여주는 사진

영화 버닝은 원작이 있는 작품입니다. 무라카미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감독이 재해석하였습니다. 저는 원작은 보지 못하였지만 원작을 본 사람들의 평은 모티브만 가지고 오고 다르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시대와 배경이 다르기에 푸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영화는 2018년 5월 개봉 당시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극찬을 받고 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시작으로 2년간 무려 17개의 수상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 버닝 전종서
영화 버닝 전종서

영화 버닝은 현실과 이상, 가난과 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는 않는 것 등 모든 것들의 경계를 얘기합니다. 영화를 해석하기 전에 주인공들부터 알아볼게요. 극에서 유아인은 배달 알바로 연명하는 3류 소설 작가 지망생 종수 역을 연기합니다. 종수의 아버지는 과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중동과 베트남 전쟁 등 국가에 순응하며 살았지만 현실은 가난과 분노뿐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갔습니다.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는 카드빚으로 가족들에게 외면받고 그레이트 헝거를 꿈꿉니다. 이상은 크지만 우물에 갇힌 듯 답답하고 좁은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벤역을 맡은 스티븐 연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넉넉합니다. 자신과 달리 궁핍한 형편의 종수와 해미를 흥미의 요소로 생각합니다. 

 

종수가 타고 다니는 낡은 트럭과 벤의 차 포르쉐는 계층의 경계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둘의 식사에서도 경계는 드러납니다. 종수는 혼자 살며 생존을 위한 식사의 기능을 취한다면 벤은 자신의 마음대로 만들고 먹는 흥미거리로 여깁니다. 이렇듯 벤과 종수의 생활에서 빈과 부의 경계를 볼 수 있습니다.

버닝 전종서
영화 버닝 / 해미 뒤로 보이는 비닐

이창동 감독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라는 게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화에 모든 것들이 내가 확인하기 전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부여합니다. 삶의 이유를 찾고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방황하고 고찰합니다. 해미의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나 종수의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같은 말처럼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현실이 아닐까요. 

 

대사 "저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처럼 영화는 미스터리한 모호함이 깔려있습니다. 후반에 벤의 주차장에서 종수가 보일을 부르자 종수에게 다가온 고양이는 보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2개월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 그러나 그가 태운 비닐하우스는 보이지 않고 그 존재를 확인하려는 종수의 질문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해미는 벤이 죽인 것일 수도 자살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실제 하는 현실일 수도 있고 마지막에 키보드를 치는 장면으로 미루어 보면 종수의 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버닝 많은 의미가 담긴 비닐하우스 씬
영화 버닝 / 많은 의미가 담긴 비닐하우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닐하우스. 이 비닐하우스는 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일 수도 있고, 해미일 수도 있고, 현실에 갇혀 이상을 꿈꾸는 종수와 해미 같은 청춘일 수도 있습니다. 비닐하우스는 투명한 비닐이지만 밖에서 안이, 안에서 밖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밖은 사회 즉 세상을 의미하고, 안은 종수와 해미의 현실을 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세상도 그들을 바라봐 주지 않고 현실에 갇힌 그들도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빛을 받아 열로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은 더 이상 희망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닐하우스를 미관을 해치는 대상으로 삼아 마땅히 태워야 한다는 벤의 시선이 비참하게 여겨집니다. 이렇듯 주인공 세 사람에게는 빈과 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발버둥 치는 인생이 담겨있습니다. 

 

감독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분노'를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그 분노의 표현을 원작 소설에서는 헛간을 버닝에서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게 아닐까 싶은데요. 버닝에 관한 기사를 찾던 중 벤을 '망각'이라는 의미로 두고 영화를 평하는 글을 봤습니다. 그 관점으로 보면 기억과 망각,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경계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럼 또 어떤 새로운 현실이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영화 버닝 유아인
영화 버닝

이창동 감독은 촬영할 때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을씬을 찍으려고 매일을 기다려 촬영했다고 합니다. 그 기간이 무려 한 달이 걸렸다고 하니 노을 장면이 영화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고 있는 게 당연한 거였습니다. 버닝을 대표하는 두 가지를 꼽자면 노을과 엔딩에 흐르는 음악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과 영상의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는 많은 은유와 상징 그리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극장 보단 ott의 되감기와 다시보기 기능을 사용해서 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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